날짜: 2015.8.29
걸어온 길: 조령산휴양림~조령관~조곡관~KBS세트장~주흘관~옛길박물관(9.5km, 3시간)
하늘재~대원미륵사지~주차장(3km, 1:10분)
<문경새재>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의 『새(사이)』, 새로 된 고개의 『새(新)재』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500년간 영남의 관문 역할을 했던 새재.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추풍령과 새재, 죽령 등 3개의 고개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이중 새재 코스가 열나흘 걸리는 가장 빠른 길이었고 추풍령은 보름길, 죽령은 열엿새길이었다고 한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은 유독 새재를 고집했다.
추풍령은 추풍낙엽 떨어지듯 낙방할 것 같고 죽령은 대나무 미끄러지듯 떨어질 수 있어 피했다고 한다.
새재를 넘어 과거를 치른 영남 유생들의 ‘합격률’이 높자 호남의 선비들도 일부러 영남 땅으로 돌아 넘었다는 고개다.
새재에는 고갯길 입구의 주흘관, 중턱의 조곡관, 고갯마루의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이 있다.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으로도 불리는 이 성곽은 임진왜란때 순식간에 한양을 빼앗기자 전란이 끝난 후 부랴부랴 쌓은 것이다.
이 관문은 영남 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 이라 생각했지만 신립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탄금대)로 후퇴하였다.
그 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년) 에 이르러서야 3중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이름한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이 남아 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 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 (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 괴산쪽 새재길이다.
이 길은 몇 번이나 리모델링을 하고 있는데 오늘은 몇 해전에 황토길로 수정했던 곳을 다시 갈아엎고 고운 자갈과 모레로 다시 깔았다.
▲ 길을 걸으며 볼 수 있는 안내판 및 데크가 추가 수정되었다.
▲ 새재는 대부분 나무가 울창해서 넓은 길이라 하더라도 나무 그늘이 만들어진다.
▲ 조령관 입구에 있는 과거길에 대한 내용
조령관을 넘으면 문경이다. 말하자면 도 경계다.
▲ 이곳은 백두대간이 지나간다.
▲ 문경쪽에서 바라본 조령관
▲ 넓은 터가있어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는 길목이다.
▲ 과거길을 따라 내려오면 책바위를 만난다.
옛날 어느 부자집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치성을 드려 어렵게 아들을 얻었으나 몸이 허약해 공부도, 일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 끝에 유명한 도인을 만나 물으니,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氣運)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직접 담을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렀다.
오래전부터 과거를 보기 위해 이곳을 지나던 선비들이 책바위 앞에서 장원급재를 빌었다고 하며 지금도 영험하다는 소문이 있어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낙동강 발원지는 3곳으로 되어있다. 태백의 황지, 슨흥 소백산 그리고 여기 문경새재 초점 이라고 한다.
▲ 조곡관
▲ 조곡약수
▲ 교귀정터
신.구 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곳이다.
▲ 길이 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부작사부작 편하게 걷는다.
▲ 주흘관은 공사를 하고있다.
주흘관을 지나면 옛길 박물관이 나오며 이곳에서 새재길은 끝이난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하늘재로 향한다.
<하늘재>
충주 계립령 하늘재는 충주 미륵사지에서 경북 문경 관음리를 동서간 연결하는 옛길로 삼국사기에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3년 (156년)에 죽령과 추풍령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냈다.
죽령보다 2년이 빠른 한반도 최초의 길로써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재, 지릅재, 닷돈재를 합해 계립령이라고도 한다. 이름만 봐선 하늘과 맞닿은 높은 고개 같지만, 실제로는 해발 고도 525m로 그리 높지 않다. 하늘재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이곳을 통해 신라는 중원을 꿈꿨고 고구려와 백제는 남녘 바다를 도모했다.
세력 다툼의 접점인 탓에 싸움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재는 고려시대에 ‘대원령(大院嶺)’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교통로로 더욱 발전한다.
주변에 미륵사, 관음사 등 대형 사찰이 세워지고 큰 역원과 함께 산성들도 축성된다.
조선 들어 문경새재가 열리면서 하늘재는 그 효용이 떨어져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다. 거대한 사찰도, 그 옆의 커다란 고려 역원도 바닥의 석물만 남은 채 스러져갔다.
▲ 하늘재 백두대간 표지석
▲ 표지석 뒤로 포암산이 보인다.
▲ 표지석 뒤 등산로를 따라 하늘재 길로 내려선다.
▲ 멀리 월악산 국립공원의 박쥐봉이 보인다.
< 월악산 미륵사지 >
충북의 월악산 자락과 전북 익산에 같은 이름의 미륵사지가 있다. 익산의 절터가 도회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충주의 미륵사지는 심심산골 외진 곳에 틀어박혀 있다. 차가운 골바람 부는 미륵사지에는 석불과 오층석탑, 석등, 귀부 등이 남아 천 년 전 옛 영화를 전한다. 지금 인적 뜸한 하늘재 아래의 미륵사지엔 키가 10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지키고 서 있다. 1개의 돌로 조각한 것이 아니고 화강암 덩어리 6개를 탑처럼 쌓아 올려 조성한 석불이다. 부드러운 미소의 석불도 볼거리지만 석불이 들어앉은 돌집이 이색적이다. 석불은 ㄷ자 모양으로 앞이 터진 돌집 한복판에 길쭉하게 솟아 있다. 경주의 석굴암처럼 석굴 안에 석불을 들어앉힌 모습이다. 6m 높이로 석축을 쌓아 석불을 에워싸고 목조로 둥그런 지붕을 만들어 얹었던 ‘지상의 석굴암’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마의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의 절터이다.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미륵대원지 속조귀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란다.
▲ 5층석탑
▲ 사각석등
▲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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