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장성새재 옛길

트렉매니아 2015. 8. 11. 13:41

날짜: 2015/8/8

지나온 길: 남창계곡(전남대 수련원)~새재갈림길~새재~입암지킴터(5.1km, 2시간)

 

<장성새재>

내장산 국립공원의 한 축인 입암산 일대에 장성새재 옛길이 남아 있다. 세인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 선 곳이니 한적함이야 더 말할 게 없을 터. 남도 사투리는 이를 ‘다붓한(한적한) 새름길(샛길)’이라고 표현한다.

길의 들머리는 남창계곡이다. 산성골, 새재골 등에서 흘러온 여섯 지류가 합류되는 곳이다. 예부터 ‘과실의 왕은 감이요, 감의 왕은 대봉’이라 상찬을 받아온 대봉감의 산지로도 이름났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장성새재를 거쳐 백암산과 백양사 또는 순창새재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흔히 새재 하면 경북의 문경새재를 떠올리지만 장성에도 새재가 있다. 한데 이름의 어원은 다소 다르다. 문경새재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조령(鳥嶺)의 순우리말 표현이다. 장성의 새재는 지름길 혹은 샛길의 의미가 강하다. “이 지역에 살던 선조들이 장을 보거나 과거를 보기 위해 정읍으로 넘어갈 때 지름길로 이용했던 길”이라며 “한양으로 가는 삼남대로인 갈재(노령)를 이용하기 곤란한 사람들도 관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샛길로 장성새재를 이용하곤 했다”고 한다.

오래전 장성새재 가는 길은 정감 넘치는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군용도로로 쓰기 위해 폭을 넓히면서부터 주변 환경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1970년대 들어 차량 통행은 금지됐고 길은 다시 옛 정취를 되찾아가는 중이다. 옛길은 인적이 드물다. 산행 내내 사람 한 명 보기 어렵다. 그 덕에 길을 독차지하고 걷는 호사도 누린다. 길은 완만한 편. 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여름에도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거리가 짧으니 숨이 찰 까닭도 없다. 산책하듯 ‘싸목싸목’ 걷다 보면 어느새 새재 정상이다. 선조들은 새재를 월은치(月隱峙)라고 불렀다. ‘달이 숨은 고개’란 뜻인데, 숲이 어찌나 깊든지 하늘에 뜬 달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 며칠전 다녀간 남창계곡 입구를 다시 왔다. 주말이라 계곡에서 피서를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 계곡은 사람이 많지만 조금만 오르면 이런 한적한 길을 걸을 수 있다.

▲ 위 내용처럼 새재 부근에 집터들이 있다.

▲ 사람 한 명 구경할 수 없다.

▲ 대부분 흙 길 이지만 가끔 돌 길도 만난다.

▲ 적막감이 감도는 새재길

▲ 급한 경사가 없어 싸드락~싸드락~ 걸어가면 된다.

▲ 도착하기 전 잠시 소나기가 내려 촉촉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 집터를 지나면 바로 새재다.

▲ 터가 넓어 주막과 집터가 있었으리라...

▲ 웍낙 숲이 빼곡해서 월은치라고 불렀단다.

장성새재 정상에는 순창새재로 가는 갈림길이다.

 

<순창새재>

순창새재길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잡혀 우거(牛車)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던 길이다. 녹두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흩어지고, 전봉준은 장성 북쪽에 있는 입암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장성새재와 순창새재를 거쳐 순창으로 도피했다. 전봉준은 해산시켰던 동학농민군을 모아 일본군과 재결전을 도모할 계획으로 담양 이웃마을 순창으로 가다가 지인 김경천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된다. 담장을 넘어 피신하는 전봉준을 마을사람들은 돌과 몽둥이를 휘둘러 그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동학에 희망을 걸었던 백성들은 전세가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기울자 동학군으로 향하던 마음을 걷어 들이고 실제 권력에 충성심을 보인 것이다. 그것이 목숨이나 부지하려는 세상 속 힘없고 나약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전봉준은 담양옥사에 이틀 동안 갇혔다가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4월 참수형을 당한다. 구한말, 이 땅에 녹두꽃은 피기도 전에 땅에 떨어졌다.

▲ 입암통제소로 내려가는 길도 아주 편안한 길이다.

▲ 소나기가 내려 안개가 피어오른다.

▲ 마치 공굴과 같은 숲

▲ 이렇게 새재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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