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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트렉매니아 2017. 12. 18. 09:40

강화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날짜: 2017/12/16

걸어온 길: 덕진교~덕진진~둑방길~광성돈대~용두돈대~손돌목돈대~광성보(4.2Km, 1:20)

날씨: 맑음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전국의 52개 걷기 좋은 해안길, 해안누리길로 선정된 길이다.

오래전부터 강화는 나라의 안전을 지켜주는 소중한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가 바닷길을 통해 육지로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남(한강,임진강)과 북(예성강)의 강물이 함께 흐르는 바다를 따라 걷다보면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섬을 빙둘러 만든 돈대를 만나게 된다. 몽골과의 항쟁에서부터 조선시대의 병인,신미양요에 이르는 민족의 자긍심과 국난극복의 의지가 서린 강화도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길이다. 호국돈대길은 강화대교를 건너 왼쪽에 위치한 갑곶돈대를 시작으로 염하를 따라 초지진까지 이어지는 15.4km의 해안길이다.

석모도 상봉산을 다녀오는 길에 강화나들길을 잠시 걸어본다.


강화 5진, 7보, 53돈대

진과 보는 모두 조선시대의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진은 요즘 군대의 대대, 보는 요즘 군대의 중대 규모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과 보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진, 보 아래에는 돈대가 소속되어 있다.

돈대: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를 말한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 2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2~3단의 마루를 만들고 외부를 향한 벽면에 각 층마다 작은 안혈을 내어 대포·총·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 손돌목돈대

▲ 덕진교에서 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덕진진으로 향한다.

▲ 덕진돈대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 중 하나이며 북쪽 광성보와 남쪽 초지진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용한 요새라고 한다.

신미양요(1871)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한 곳이기도 하며 이때 초토화 된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한다.

▲ 덕진돈대에서 해협쪽으로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경고비가 세워져있다. 말하자면 척화비인데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라 각인되어 있다.  풀이하자면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 남창포대

남창포대는 덕진진에 소속된 포대로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이며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때 덕진돈대와 함께 미국 아세아함대와 포격전을 전개했던 곳이며 이곳 또한 1977년에 다시 복원했다.

▲ 신미양요때 기록 사진과 설명


<덕진진>

덕진진은 병인양요 때, 양헌수장군이 이끄는 포수들이 김포에서 덕진진으로 건너, 전등사로 들어가서 진을 치고 강화읍을 점령한 프랑스 군의 공격을 기다렸다가 격퇴한 곳으로 유명하다.


병인양요(1866): 병인양요(丙寅洋擾)는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 출신 신부 열두 명 가운데 베르뇌 주교를 포함해 모두 아홉 명이 붙잡혀 순교당한 사건에 항의해 프랑스 함대가 조선의 강화도를 침공한 것을 이른다.

로즈 제독은 그해 9월 군함 일곱 척과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다시 침범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군은 강화도 일대에 대해 약탈과 방화를 저질러 행궁과 사당, 외규장각 등을 불태웠으며, 20만 프랑 상당의 금은보화, 조선 시대 의궤(儀軌) 300여 권 이상과 군기물자 등을 빼앗아 갔다.


▲ 공조루

공조루 또한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한다.


공조루를 지나 화장실 옆으로 길이 이어진다.

▲ 둑방길을 따라 걷다보면 광성보와 가까워 진다.

▲ 둑방길에 갈대밭이 펼쳐진다.

▲ 잠시 도로로 나와 걷다 우측 강화나들길 표지지(시그널)을 쫒아 들어가면 광성돈대가 나온다.


<광성보>

광성보는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어재연이, 어재순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이에 미국은 조선이 교섭에 응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군사행동을 감행하려던 미국 측은 무모함을 깨닫고 5월 16일 함대를 이끌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결과 조선의 쇄국정책 및 배외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신미양요(1871):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을 침입하여 주민을 살해하고 조선 상선을 약탈하자 평양 관군과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 호를 무력으로 물리쳤는데 이 사건이 신미양요의 계기가 되었다.

▲ 광성돈대

▲ 용두돈대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 고종8년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 용두돈대 앞은 손돌목이다. 이곳은 물쌀이 세고 거친 곳이다.

▲ 손돌목 돈대


▲ 속돌목 돈대

숙종 5년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고 한다. 돈대 넓이는 778평방미터에 성곽 길이는 108m라 한다.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다.

▲ 신미순의총

신미양요 당시 순국한 350여 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비와 묘

▲ 쌍충비각

▲ 광성보의 안해루


광성보까지 걷고 일정을 마무리한다.


다음 카페 '트렉매니아'에서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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