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옛길>
죽령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서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넘어가는 아흔아홉 굽이의 험준한 고갯길이다. 1천800여 년 동안 문경새재와 영동 추풍령과 함께 교통의 중추적 역할을 해 왔다. 바람이 거세고 소낙비가 거세고 도둑이 거세다고 해서 '삼재령'이라고도 했고, 풍치가 아름답고 길손이 반갑고 주막 인심이 좋다고 해서 '삼풍'이라고도 불렸다.
『죽령 옛길』은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지역이었는데,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에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옛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져 있는 수목 터널이 주변에 펼쳐지는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명승지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영주`봉화가, 서쪽으로는 월악산`금수산이, 남쪽으로는 소백산 일대 첩첩산중이, 북쪽으로는 연화봉`비로봉`국망봉 등이 펼쳐진다.
죽령고개는 예로부터 한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중요한 장소이며 역사와 문화권을 다르게 발전시켜온 분기점이다. 또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정을 나누었던 장소이고, 오고 가는 길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땀을 씻고 쉬어가던 휴식공간이다.
영남의 수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때로는 과거에 낙방해 쓰라린 가슴을 안고 다시 고개를 넘는 선비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서를 한 아름 안은 고을 관원, 어깨가 부서질 만큼 짐을 진 봇짐장수의 땀도 고개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죽령은 역사도 품고 있다. 죽령은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격전지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 때 죽령은 고구려의 국경선이었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해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죽령 이북(지금의 충북)의 10여 고을을 빼앗도록 했고, 삼국 통일 직전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며 장군인 바보 온달이 아내 평강공주와 왕에게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다짐하고 출전해 전사한 장소가 바로 죽령이다.
반대로 죽령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신라의 김유신은 중원 땅(충주지방)에 삼국통일 기념탑을 세웠다고 한다. 고구려 군사들이 넘어다녔고, 잃었던 땅을 되찾은 신라군과, 견훤을 물리친 고려의 왕건과, 나라를 몽땅 바친 경순왕도 눈물을 흘리며 죽령을 넘어 개성으로 갔다.
▲ 소백산 자락길 3구간은 단양에서 시작해서 소백산역(구 희방사역)까지 이나 대부분 도로라 걷기 좋은 죽령터널 입구에서 시작해 희방사역까지 걷기로 한다.
▲ 들어서자 우측으로 계곡이 펼쳐지고 걷기 좋은 길이 나타난다.
▲ 잠시만 올라서면 죽령마루로 올라서는 이정표가 있으며 호젓한 길을 따라 오르면 이내 죽령마루에 오르게된다.
▲ 이곳은 근래들어 사과 주산지가 되었다. 아무래도 기후가 온화해지니 사과 산지가 점점 북상을 한다.
▲ 사과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 말하자면 죽령마루까지 과수원이라고 해도 좋을듯 하다.
▲ 죽령마루까지는 아주 약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 사과나무 사이로 민들레가 한창이다.
▲보국사지 터
죽령(竹嶺) 마루턱에서 용부원리의 옛 도로를 따라 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오른쪽 산기슭에 있다. 보국사는 보곡사(保谷寺)·보국사(補國寺)·보국사(報國寺)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며,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절터는 약 660㎡(200평)에 이르는데, 경작지로 사용되어 훼손된 곳이 많다. 이곳에서 장육불상(丈六佛像)과 연화문대좌(蓮花紋臺座), 죽절문간석(竹節紋竿石) 토막, 연화문석판(蓮花紋石版), 주초석 등이 발견되었고, 절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장육불상의 조각 수법이나 기와에 새겨진 무늬, 일부 남아 있는 축대의 구조 등으로 미루어 9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장육불상은 몸체·좌대·지대석 등 3개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불두(佛頭)는 남아 있지 않다. 불두를 제외한 전체 길이는 4m이며, 불두를 포함하면 약 5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 죽령터널의 환기 굴뚝이란다. 워낙 터널의 길이가 길어 저런 설비가 필요한가보다.
▲ 터널로 향하며 만나는 산신각
▲죽령 고갯마루에 올라섯다. 여기서부터는 경북 상주로 접어들게 된다.
▲죽령주막 주변에 있는 장승
▲ 죽령주막 길 건너에 있는 ??문을 지나 소백산 역방향으로 향한다.
▲피나물이 참~ 많이 피어있다.
▲ 예전에는 이 터에서도 사람이 살았을 터~
▲ 으름꽃이 한창이다.
▲ 죽령옛길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또 과수원이 펼처진다. 배꽃도 보인다.
▲ 소백산역(구 희방사역)
<부석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鄕音)으로 보기도 한다.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無染)과 징효(澄曉)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圓融)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년(공민왕 21) 원응(圓應)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하여 원각전·응진전·안양루·선묘각·범종루·자인당 등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고려판각(보물 제735호)·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있는 석룡(石龍)·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 등이 전해지고 있다.
<부석>
661년,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갔을 때 양주(陽州)에 이르러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의 딸 선묘(善妙)낭자가 의상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의상의 나이 37, 선묘의 나이 17살쯤이다. 하지만 의상은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다.
선묘낭자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은 다시 길을 떠나 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을 공부하고 671년 급거 귀국하는 길에 선묘의 집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뱃길로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선묘는 비단 선물을 챙겨 산동성(山東省)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까마득히 멀어져 간 뒤였다. 선묘는 들고 있던 선물을 의상의 배를 향해 던지며 “원컨대 이 비단이 의상대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하니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자신도 용이 되게 축원을 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으로 변해 의상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배가 신라에 닿았다. 그 덕에 당나라의 침략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게 됐다.
신라로 온 선묘낭자는 다시 의상의 꿈에 나타나 500명의 이교도들을 제압할 방법을 일러주었다. 다음날 아침 의상은 선묘낭자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들기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낭자가 들어올린 것이다. 이를 두 번, 세 번 이어서 반복하자 겁먹은 이교도들이 일제히 의상대사에게 무릎을 꿇고 함께 절을 짓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공중에 세 번 뜬 바위가 무량수전 서쪽 산비탈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다
▲ 주차장에서 부석사로 향하는 오름길. 날씨가 좀 더우니 이곳이 크럭스다 ㅜㅜ
조선 후기 문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浮石)임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해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는데 지난 1967년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5m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비늘 모습까지 아련히 나타나 있었다고 하니 이 절에선 용을 많이 숭배한 것 같다. 무량수전 뒤에 선묘낭자를 기린 작은 각(閣)이 있다.
황당해 보이는 이 선묘낭자 이야기는 막연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서기 988년 송나라 찬영(贊寧) 등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당~송 350년 간의 고승 533인의 이야기 속에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이야기가 기록돼 있으니 러브스토리와 그 힘으로 절을 지을 수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절은 서기 676년(문무왕 16)에 창건됐다. 의상대사가 이 삼국의 접경지에 어렵게 건립한 사찰이 우리나라 화엄종찰이 된 부석사다. 이곳에 화엄종찰을 지어 삼국의 백성을 하나로 묶어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화엄(華嚴)은 ‘모든 사물이 어느 하나라도 홀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게 아니라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의존해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다(일즉일체, 일체즉일ㆍ一卽一切, 一切卽一)’는 사상으로 무진연기(無盡緣起)ㆍ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생사와 열반(涅槃)이 서로 대립되는 현상이 아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그러한 뜻에서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ㆍ청정 광명한 이상적인 불국토)라고 한다.
이 화엄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을 대립이 아닌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것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왕권국가의 율령정치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니 문무왕은 삼국통일 후 고구려ㆍ백제 백성들을 통합하기 위해 삼국의 접경지에 통일국가의 상징물로 화엄종찰을 원했던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심신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전국 10여 곳에 절을 지으니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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