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인천).경기

교동도에서 병신년을 보내다

트렉매니아 2017. 1. 2. 11:44

교동도


2014년 7월1일 인천 강화도 본섬과 북한 접경 지역인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가 정식 개통됐다.

 길이 3.44km,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연륙교는 총 사업비 890억 원이 투입됐으며, 2008년 19월 25일에 착공하여 6년 만에 완공되었다. 사장교 형태이며 교량의 길이는 3.44km로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도 심한데다 빠른 물살 때문에 교각 일부가 유실되는 등 공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한다.

교동도는 민통선 북방지역이기에 해병 군부대에서 검문을 하며 교동 군민은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외지인들은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까지만 통행이 가능하단다.

검문소에서 외지인들에게 출입 목적 확인 등 소정의 절차를 확인 후 신분증을 제출하고 출입증을 발부 받아야만 다리를 통과할 수 있으며 나올 때는 출입증을 제출하고 신분증을 찾아 나오면 된다.

교동도는 북한쪽 황해남도 연안군과 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화도 북단 최전선의 섬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북녘 땅을 바라보며 여행의 무게감을 느끼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해변의 평지에 자리한 거대한 난정저수지와 강화군 전체에서 가장 넓은 교동평야, 그리고 교동읍성과 철책선의 긴장감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섬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리호를 타고 건너가던 섬이었지만 지금은 다리를 건너서 갈수 있게 된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는 섬이다.

역사속의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 1천년간 개성과 서울의 관문이자 군사요지였으며, 활발한 무역항이었다 한다. 지금도 옛날 중국 화폐가 많이 출토된다고 하며 고려 시대에 교동의 위치는 수도 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개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꼭 들려야 하는 중간 기착지였다고 한다.

 교동 남산포구에 도착한 중국 사신들을 맞았던 곳이 남산포 대변창이며 대변은 손님을 맞는다는 대빈(待賓)이란 말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형된 글자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교동은 충청도, 황해도, 경기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 통어영이 설치된 곳이었으며 당시 교동의 원님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 받았던 곳이다.

또한 교동도는 조선시대부터 왕족의 유배지로 유명했었다고 한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부근당 인근에는 '강화도령' 철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철종 잠저소가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인 13세때 먼 친척이 모함으로 피살되자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피신해 석달을 지냈다고 한다.


▲ 월선포에서 바라본 교동대교

▲ 월선포에서 바라본 석모도

<교동향교>

고려 충렬왕 때 안유(안향, 1243∼1306)선생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이 향교에 봉안하였다고 전하며, 이 후 각 고을에 향교가 생겼다고 한다.

원래 화개산 북록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남록으로 옮겼으며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과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현을 배향하고 있다. 매달 음력 초하루, 보름에는 전교, 유림들이 모여 분향을 하며 교동향교 왼편의 약수가 있는데 마시면 학문에 더욱 정진케 된다는 말이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최초로 창건된 유서 깊은 곳이다. 최초 창건은 1127년(인종 5)으로 이때는 화개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 1286년(충렬왕 12)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원나라에서 공자상(孔子像)을 들여와 봉안하였다. 그 후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을 중국에 보내어 성철(聖哲)화상 10점과 제기(祭器) 등을 구해오게 했는데, 이때 서해로부터 귀환하면서 교동에 기착하여 문묘에 봉안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써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와 제자들의 화상(畵像)을 봉안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경도와 각읍에 문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 교동향교


▲ 대성전(공자상이 모셔져 있다)


<화개산>

해발 260m로 2시간이면 산행을 끝낼 수 있어 당일 교동도 여행이라면 가벼운 기분으로 산행할 수 있고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서해바다와 북쪽의 연백평야가 일품이다.

화개산에는 조선 명종 10년 (1555년)에 왜란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내성과 외성을 증축하고 성안에 군량창고를 두었다고 하는 성터가 산줄기 및 정상부분까지 훼손된 상태이지만 그대로 남아 있고, 높이가 80Cm 폭이 4m 쯤 되는 문지와 내성의 우물로 추정되는 화개약수터가 있어 산행시 갈증을 풀어주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넓은 공간도 있다.


▲ 화개산 정상

▲ 성혈(星穴)바위

청동기 이후의 유적으로, 하늘에 별자리, 풍요와 다산, 장수, 태양 또는 자연숭배, 마을 제단 등,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바위구멍을 통한 주술적 해위의 흔적이다. 주로 고인돌에서 볼 수 있으나 자연암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 화개약수

▲ 연산군 유배지

전에 없던 건물이 생겼다. 사진과 같이 연산군 유배지란다.



<대륭시장>

교동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여느 지방의 읍내보다도 작은 규모다. 골목은 짧다. 길이는 400미터 남짓. 빠른 걸음으로 1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골목은 어른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갈 만한 폭이다. 칠이 벗겨진 창틀, 손으로 꾹꾹 눌러선 입간판, ‘선팅’이 벗겨진 유리문……. 붉은 보도 블록이 깔린 길은 울퉁불퉁하다. 짧은 골목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미장원과 분식집, 통닭집, 전파사, 시계점, 이발관, 신발가게, 잡화점 등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간판이다. 모두가 ‘그 때 그 시절’에나 보았을 법한 낡은 것들이다. 글자가 지워진 것도 있고 덧칠된 것도 있다. 촌스러운 간판 이름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다.






▲ 1박2일 강호동이 머리를 깍던 교동이발소


▲ 요즘 찾아보기 힘든 약방

▲ 시간이 멈춰버린 시계방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7년(1629)에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 곳에 성문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라 하였습니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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