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창경궁 산책

트렉매니아 2016. 11. 28. 09:59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그 전신이다. 이후 성종 임금 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화를 입었다.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이야기 등이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사적 제 123호인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창경원이라 격하되고 동물원으로 탈바꿈 했었으나,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온 겨레의 노력으로 1987년부터 그 옛날 본래 궁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화문, 명정전(조선 왕조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등이 있으며 구름다리를 통하여 종묘와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 주요 문화재 - 홍화문(보물 제 384호), 명정문(보물 제 385호), 명정전(국보 제 226호), 통명전(보물 제 818호), 옥천교(보물 제 386호)


'홍화(弘化)'의 뜻은 교화, 덕화를 널리한다는 뜻으로 창경궁의 다른 전각들의 이름과 함께 서거정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구고 있다. 여러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창경궁·창덕궁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 홍화문

홍화문 우측에 매표소가 있으며 일반인은 1,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

▲ 명정문

홍화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옥천교가 있으며 이 다리를 지나 명정문을 통과하면 명정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충당지로 항햐는 길목

▲ 춘당지

창경궁 내에 있는 연못으로서, 1909년에 춘당대 앞 귄농장 자리에 연못을 파고, 춘당대 앞이 되므로 춘당지라고 이름 붙여졌다. 연못가에 수정을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으나, 창경궁이 복원되면서 연못으로만 정비되어 있다.


▲ 창경궁 팔각칠층석탑(보물 제 1119호)

창경궁 안에 있는 팔각칠층석탑은 중국식 석탑으로서, 기존의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탑이다. 높이 6.5m 규모인 이 탑은 현재 창경궁 내 식물원 앞 연못 춘당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1992년 1월 15일에 보물 제1119호로 지정되었고, 창경궁 관리소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 성종태실비

태실은 왕자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로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을 얘기한다.

태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1928년 즈음 왕실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 한다.

▲ 풍기대,앙부일구 옆에 있는 수석

▲ 앙부일구

1434년(세종 16)에 제작되었다. 앙부일구의 제작자는 불분명하지만 “(세종이) 이순지(李純之)에게 명해 의상(儀象)을 교정(校正)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규표(圭表)·대평(大平 또는 天平)·현주(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다”라는 『세조실록(世祖實錄)』의 기사를 참조할 때, 이순지가 앙부일구를 비롯한 각종 의상 제작에 책임자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풍기대

풍기대를 이용하여 바람을 관측한 것은 조선 세종 때 측우기의 발명과 더불어 제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바람은 24방향으로 관측했으며, 바람의 세기도 강우량과 같이 8단계로 나누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상위고 권3 중 "대궐 가운데에 풍기가 있는데, 예로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에서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을 꽂아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현존하는 경복궁과 창경궁의 풍기대는 1770년(영조 46)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그후에 제작된 풍기대가 현재 창덕궁의 연경당 앞뜰에 남아 있다.

▲ 양화당 뒷모습

▲ 통명전 정면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는 창경궁 통명전(昌慶宮通明殿)은 창경궁에 있는 왕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인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1575년(선조 8)에 이 전각에서 인순왕후가 승하했고, 1790년(정조 14)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복원했다고 한다. 현재 창경궁에 남아 있는 내전 가운데 유일하게 월대가 있는 전각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며, 특히 용마루가 없는데 이것은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를 놓았다.

▲ 통명전 측면



▲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 1830년(순조 30년) 또다시 불에 탄 것을 1843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1878년(고종 15년) 철종의 아내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양화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이다.

▲ 경춘전(좌), 환경전(우)

경춘전

원래 대비전으로 쓰인 건물이다. 인수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혜경궁 홍씨가 거쳐하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 헌종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인수대비와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환경전

환경전 또한 침전임에도 불구하고 용마루가 있다. 또한 중종이 환경전에서 훙서하였다.

▲ 문정전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명정전의 오른쪽인 남쪽으로 명정전과 직교하며 서 있다. 여기서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죽은 곳은 선인문 쪽이라 한다. 원래 12칸이었으나 복원 때 9칸으로 복원하였다. 동궐도에서 보면 문정전 주변에 회랑이 쳐져있다.

▲ 빈양문


▲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은 성종 15년(1484년)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중건한 건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2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지어, 중층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보다 격식이 낮다. 특이한 점으로는 건물 뒤쪽에 퇴칸 형식의 월랑을 두고 있으며, 건물 내부의 앞쪽으로 고주를 세우고 뒷부분 기둥은 모두 생략하였고, 정면 양 협칸의 벽면 하부를 전복돌로 쌓아 점을 들 수 있다.

명정전은 뒤쪽 터가 높게 경사져 있어, 뒤를 제외한 세 면에만 경사지에 맞추어 월대를 조성하였고, 좌향도 지세에 흐름을 맞추었기 때문에 정문인 명정문의 중심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다.


▲ 드무

▲ 창경궁을 둘러보고 함양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향한다.

함양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오가는 문으로 후원(비원) 우측에 자리잡고 있으며 창덕궁 입장료는 3,000원이다.

'여행스케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천 낙안읍성  (0) 2016.12.19
창덕궁 산책  (0) 2016.11.28
천연기념물 단풍나무숲을 품고있는 고창 문수사  (0) 2016.11.07
보령 청라은행나무  (0) 2016.10.24
인제 갑둔리 5층석탑  (0) 2016.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