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17구간(화엄사입구~난동)(2016/10/22, 맑음)
걸어온 길: 오미리(곡전재,운조루)~화엄사입구~수한마을~방광마을~당동~난동마을(9.5km, 4:30분)
지리산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도(전북, 전남, 경남), 5개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74km의 장거리 도보길로 2012년 5월에 모든 길이 완공되어 정식 개통했다.
최초 지리산 길의 출발은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해 2004년 '생명 평화'를 이 땅에 뿌리고자 길을 나선 순례자들의 입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지리산 순례길이 있으면 좋겠단 제안이 나왔다고 한다.
그 제안이 다듬어지고 구체화되어 지리산길(둘레길)이 “사단법은 숲길”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미마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는 본래 오동이라 불리다 조선 중기에 유이주가 이주하면서 오미리라 개칭해 지금에 이른다. 오미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담았는데, 월명산. 방장산. 계족산. 오봉산. 섬진강 이 그것이다. 이 곳 오미리는 남한의 3대 명장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길지다. 풍수지리에서는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국이라 한다. 즉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곳으로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풍요로운 곳이라는 뜻이다. 조선 중기의 양반가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운조루와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담은 곡전재가 유명하다.
▲ 곡전재 입구
곡전재
2003년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2003-9호로 지정되었으며, 고택 관광자원화사업의 대상이 되어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 4채를 펜션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목조 건축물. 부농의 민가형식으로 지었으며 부연(附椽)을 단 고주(高柱)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석가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다. 풍수지리상으로 천상의 선녀가 떨어뜨린 금가락지 모양이라 하여 금환락지(金環洛地)라고도 한다. 1929년 승주에 살던 박승림이 건축하였으며, 1940년 곡전 이교신(李敎臣)이 인수하여 현재 5대손이 살고 있다. 원래 6채 53칸 규모로 지었으나, 현재는 5채 51칸 규모이다. 문간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ㅡ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높이 2.5m 이상의 호박돌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수 당시 동행랑과 중간채가 훼손되었으나 1998년 1월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였으며, 새로 ‘춘해루’라는 누각을 짓고 연못(세연)을 확장하였다.
▲ 높고 굵은 호박돌을 사용한 돌담이 인상적이다.
▲ 뒤뜰에 연못이 있고 앞 마당을 흘러 담밖으로 흐르게 되어있다.
▲ 곡전재를 빠져나와 운조루로 향한다.
▲ 오미마을 입구에 주차장, 화장실과 같은 편의시설이 있으며 누구나 탈 수 있는 그네가 있다.
운조루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 뒷뜰에 들깨를 말리고 있다.
▲ 확독과 멧돌
▲ 달구지 바퀴로 보인다.
▲ 운조루의 뜻
▲ 운조루와 곡전재를 둘러보고 화엄사 입구에서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 수한마을 약수터
수한마을
조선 선조 25년경에 임진왜란을 피해 남원에서 이주한 경주김씨 3세대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본래 물이 차다하여 물한리로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수한마을이 되었다. 마을에는 520년 수령의 도나무 당산나무 잎이 일시에 피게 되면 풍년이 들고, 2~3회 나누어 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마을 당산에서 매년 당산제를 지내 마을의 평안을 빈다고 한다.
▲ 수한마을 당산나무
▲ 수한마을을 지나 방광마을로 향한다.
▲ 방광마을 입구
방광마을
마을이름은 이 마을에서 판관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했다. 즉, 판관이 팡괭이로 변했다가 다시 방광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름에 얽힌 다른 전설도 있다. 지리산 우번대라는 암자에 노승과 사미스님이 살았는데, 어느 날 천은사 뒤 계곡을 오르다가 사미스님이 남의 밭에서 조 세 알을 손에 쥔 것을 본 노승이 ‘너는 주인이 주지 않은 조를 가졌으니 주인집에서 3년간 일을 해 빚을 갚으라’고 말하면서 사미스님을 소로 변신시켰다. 그 날 밭주인이 소를 발견해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 소가 여물 대신 밥만 먹었고, 쇠똥이 땅에 떨어지면 빛을 내면서 곡식이 잘 자랐다 해서 방광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방광마을은 들 가운데 형성된 큰 마을로 마을 안에 정미소가 있다. 마을 복판에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골목길을 따라 가며 만나는 돌담과 산수유나무도 볼거리다.
▲ 방광마을 정미소와 당산나무
▲ 코스모스와 함께 가을 전령사인 국화
▲ 방광마을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감농장이 나온다. 가을에 익어가는 감 또한 볼거리다.
▲ 단감, 대봉 등 상당히 넓은 과수원에 감이 익어가고 있다.
▲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 농장 화이트보드에 전화번호 및 크기별 가격이 적혀있다. 요즘같은 시대에는 택배주문이 편하다.
당동마을
지리산 남악사당이 이 마을 북쪽에 있었다고 해서 당동마을이란 이름을 얻었다. 고려 때부터 100여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지만 봄가을 남악제를 지내기 위해 남원부사와 고을 수령의 발길이 잦았었다. 당동마을은 최근 화가들이 많이 이주해와 ‘화가마을’로도 불린다. 지리산둘레길이 지나는 곳에는 화가들이 짓고 있는, 현대적 조형미가 느껴지는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 당동마을 초입
▲ 일명 화가촌으로 불리우는 당동마을
▲ 당동마을을 지나 난동마을에서 익어가는 산수유 열매
▲ 수확한 모과를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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