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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산 미황사와 도솔암

트렉매니아 2017. 2. 27. 09:33

달마산 미황사와 도솔암

날짜: 2017/02/25

지나온 길: 송지면 마봉리(약수터)~임도~도솔암입구~도솔암~땅끝천년숲 옛길~부도전~미황사(8km, 4:00분)


달마산
이 암릉은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불썬봉)을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그 기세를 전혀 사그러트리지 않으며 이어진 다음 땅끝 (한반도 육지부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서야 갈무리하는 것이다.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록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이 산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 스님이 100명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싣고 가다가 소가 한번 크게 울면서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다시 소가 멈춘 곳에 미황사를 일구었다고 한다. 어여쁜 소가 점지해준 절인 동시에 경전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이다.


마봉리 약수터에서 임도길을 따라 약 1시간 정도 오르면 도솔암 입구가 나온다.

승용차로 올라갈 수 있다. 다만 다수의 차량을 주차할 공간은 없으나 5-6대 정도는 주차가 가능하다.

산행으로 원점 회귀를 할 경우 미황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달마산 능선을 이용해서 도솔암에서 땅끝천년숲 옛길을 이용해 미황사로 오는 코스를 이용한다. 이 경우 넉넉하게 5시간 정도 소요된다.

▲ 도솔암 입구에서 능선을 따라 도솔암 방향으로 걷다보면 아름다운 달마산의 능선과 마주하게 된다.

▲ 뒤돌아본 도솔봉 정상. 도솔봉 정상은 군부대가 자리를 잡고 있어 출입이 불가하다.

▲ 능선 끝자락에 달마산 정상이 보인다.

▲ 도솔암 입구

▲ 일출을 기다렸으나 붉은 기운만 보이더니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완도쪽 방향으로 운무가 가득하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천년숲 옛길로 발걸음을 돌린다.

▲ 도솔암 주변


달마산 도솔암

도솔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 당대의 고승 화엄조사인 의상대사께서 창건한 천년의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달마산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께서도 미황사를 창건하기 전 도솔암에서 수행정진 하셨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암자이다.

그 후로도 여러 스님들께서도 기도 정진하였던 도솔암은 정유재란당시 불에 타 흔적만 남았던 것을 30년 전 부터 여러 차례 많은 스님들께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인연이 되지 않아 불사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 생불로 알려진<곡성 성륜사 조실 청화대종사>스님께서 도 한때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 이후 2002년 6월8일 오대산 월정사에 계셨던 현 주지<법조>스님이 연속3일간 선 몽의 꿈을 꾸고 찾아와 도솔암 터를 보시고 해몽한 후 32일 만에 단청까지 복원 중창했다고 전해온다.

도솔암은 미황사의 열두 암자 중에 하나로 달마산의 가장 정상부에 있어 “주변 풍광이 워낙 수려하며 일출, 일몰 및 서 남해의 다도해를 감상할 수 있으며 마치 구름 속에 떠있는 듯 한 느낌과 달마산의 새로운 선경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석축을 쌓아올려 평평하게 만든 곳에 자리 잡은 도솔암은 마치 견고한 요새와도 같다.

도솔암에서 50m쯤 아래에는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용담 샘 있는데 용이 승천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리고 풍광이 뛰어나 각종 드라마(추노, 각시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등) 및 CF촬영 명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 도솔암

▲ 작은 암자이지만 주변 풍광은 어느 암자 못지않게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 도솔암 오르는 길


▲ 도솔암에서 천녀숲 옛길로 내려오는 길은 바위가 많고 경사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 올 봄 처음으로 보는 길마가지나무 꽃

▲ 천년숲 옛길로 접어들면 걷기편한 숲길이 이어진다.

▲ 부도전 부도밭


미황사
미황사는 해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 서쪽,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자리한 사찰이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의조화상이 창건했다. 고려시대에는 남송의 달관(達官), 군자(君子) 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전기까지도 사세를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1754년(영조30년)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에 보면 미황사는 임진왜란 이후 세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그뒤 1658년(효종 9년)에서 1660년(현종 1년)까지 두 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세번째는 1751년(영조 27년)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 되었다.


18세기에는 당대 화엄종주로 추앙받던 연담유일 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스님은 특히 미황사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서 바다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수륙재를 지내주기도 하고, 문집 <임하록(林下錄)>을 이곳 미황사에 머물던 1799년(정조 23년)에 펴내기도 했다. 입적 후 연담스님 부도가 미황사에 만들어졌다.

1858년(철종 9년)에는 영허의현 스님이 미황사에서 만일염불회를 개설했음이 초의선사가 지은 <미황사만일회기>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황사는 한순간에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100년 전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혼허스님이 절의 중창을 위해 서산대사진법군고 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뒤집혀서 스님 한 분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서산대사진법군고는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부터 승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군악으로 이때는 마을을 돌며 풍년을 기원해주고 지신도 밟아주는 농악대의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미황사는 일시에 스님이 모두 죽고 빈 절이 되어 이후 거의 백 년 동안 잊혀진 절로 남게 되었다.


퇴락한 지 100년이 흐른 1989년 즈음, 지운, 현공, 금강 스님이 주인 없이 비어있던 미황사에 들어서면서 퇴락한 법당을 일으켜 세우고 잡초 무성한 마당을 쓸기도 하면서 살기 시작하며 하나하나 복원되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땅끝 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청이 벗겨진 대웅보전은 그 사이 보물 947호로 지정되었고, 내부의 화려한 벽화와 기둥 아래 주초석에 새겨진 게와 물고기와 거북이는 이곳의 특징이 되었다. 응진당(보물 1183호)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 세심당, 후원, 향적전, 안심료, 자하루, 감로다실 등이 세월의 흐름 속에 고즈넉히 자리잡고 있다.


▲ 냉해를 입었는지 상처가 있는 홍매

▲ 민하당

▲ 수선화

▲ 미황사 대웅보전